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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파독광부 출신 침구사, 정일교 선생 이야기

2019-11-23 조회 602








 

인생2막을 자원봉사로 꽃피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과 영상으로 표현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예술인 파견사업을 신청했다.
생애가 녹아있는 자원봉사, 이웃에게 베푸는 삶으로 보람찬 노년을 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은은한 인생의 향기와 멋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침뜸을 비롯하여 우리의 생명건강문화를 배우고 익혀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국내외에서 이웃의 건강관리를 도와주며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나는 감동을 받고 그들의 아름다운 삶으로 내 정신은 힐링이 되어왔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자원봉사 하는 분들의 이야기는 정말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들의 훈훈한 삶의 이야기가 문학이 되고 예술이 되고, 문화콘텐츠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생애에서 우러나오는 ‘그 무엇’은 봉사자 자신들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누고 비우는 가을의 풍요처럼, 서럽도록 화려한 황혼의 찬란함처럼 그렇게 베풀며 살아가는 인생2막 자...원봉사의 의미를 예술적 안목과 감성으로 간파하여 표현할 수 있는 예술인을 만나고 싶었다.
파독 광부출신으로 나이들어 이제 미얀마에서 침뜸봉사하는 정일교 선생님이 예술인들을 심쿵(heart beat)하게 한 모양이다. 그리고 작품이 나왔다.

 

 

[배우 황재희 님의 글]

 

2019년 10월, 배우 황재희 님이 페이스북에 두번에 걸쳐 올리신 글 중에서 첫번째 편입니다_


정일교 해외 침구사님(미얀마)을 만나고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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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돌을 보았다. 사람이 만들었지만 그건 분명 사람이 만들지 아니한 것과도 같았다. 햇살이 품고 비바람을 맞고 차가운 서리와 눈을 견디며 고색창연한 석물이 된다. 시대와 세대를 거스르며 자연과 시간이 완성해낸 거대한 조물주가 된다. 이것은 분명코 돌일 뿐인데. 동시에 돌이 아니다. 정성껏 쪼고 깨며 다듬어서 다시 살아 돌아온 것만 같은 한숨일까, 고행일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다다라야만 저 거뭇거뭇한 자욱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지난여름 정일교先生님을 처음 만났다. 점잖으신 노신사의 일흔여덟 해 기나긴 삶의 항로를 듣자오니, 비로소 지금 금추金秋가 되었는데. 삶이란 이처럼 눈을 한 번 깜빡이면 그만이다. 배우俳優로서 나는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을 고스란히 담은 정先生님을 몇 번 만나면서 사람 공부를 할 수 있겠다고 간사스러웠다. 그러나 웬일인지 외로운 그림자나 붉은 모양의 노을길이라기 보다는 정先生님을 뵈면 뵐수록 희망이 샘솟고 다시 여러 차례의 인생 계획을 세우고 싶을 정도로 푸르름이다.
나는 이천년대 초반 독일에서 유학을 하였고, 지금은 연극무대를 누비면서 세 살과 다섯 살 난 두 딸아이를 기르는 엄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비행기를 타고 멀리 독일로 날아간 광부였다.

우리나라는 부푼 경제개발의 꿈을 안고 1977년까지 8,395명의 광부를 독일 석탄 광산으로 보내어 일하게 하였다. 제2차 파독 광부였던 정일교先生은 1000m 땅속에서 뜨거운 지열과 매캐한 가스냄새를 이겨내었다. 처음에는 작고 왜소한 덩치 때문에 독일인 광부들 사이에서 업신여김을 당하였다. 처음은 모두 서투르기 마련인데, 동양에서 건너온 사람이라고 더욱 그러했을까. “Du Schwein!" (두 슈바인, 이 돼지새끼야!) 욕도 욕인 줄 모르고 네네 하며 묵묵히 일했을 청년 정일교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고향에서도 부지런하고 성실하기가 둘째라면 서러울 그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일념으로 팔뚝이 굳은살 박인 발바닥처럼 딱딱해질 때까지 일하고 또 일하였다. 한국 사람들은 머리가 샤프하고 손재주가 비상하여 결국에는 인정을 받는다면서 신이 나 후일담을 털어놓는 정일교先生의 오목하게 골이 진 인중을 바라보며. 우리네 아버지고 할아버지고 왜 아니 떠오르겠는가.

한반도의 등줄기 태백산맥의 영향으로 해발 1,500m 이상의 험준한 산들이 솟은 강원도 그중에서도 동해에서 1941년 그는 태어났다. 8남매의 장남이었다. 그의 아내 순복씨도 오년 뒤 강원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퍽 어려서부터 일을 하였고 18세부터는 광산으로 일을 하러 다녔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셨지만 양식이 워낙 부족한 시절이라 그도 일을 하면서 동생들 뒷바라지를 도와야만 했다. 군생활을 마치고 결혼을 한 후에도 탄광생활은 계속되었다. 위험한 곳에서 돈을 벌며 죽고 사는 일을 고민했던 시간들. 그 때 탄광에서 몸으로 익혔던 공동체 정신을 통해 나 혼자 사는 것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배고팠기에 꿈이란 것도 없었다. 많이 벌어 농토를 사고 농사를 지어 식구들이 배불리 먹고 살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그리고 배우고 싶었다. 중동고등하교 야간부를 다니다가 삼척으로 내려갔다. 동부건설 김진규 회장의 차남인 친구 김진권씨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남의 집 살이도 해보고, 파고다공원에서 구두닦이도 하였다. 겨우 벌어 끼니 한 끼.

못 먹고 못살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내가 우리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럼 지금은 과연 살기가 좋아졌을까.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이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때를 포함하여 각 시대를 아우르는 범인류적 연대의식은 오늘날 어떠한가. 내 아이들이 살아갈 앞으로는 또 어떠할까.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하다.

정일교先生님은 얼마 전 다시 독일을 찾았다. 수십 년 만에 만난 함본 광산은 그의 눈에 그대로다. 오랜 동안 그렸을 그곳. 4년 동안 일을 하면서 고향땅으로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돈을 부치고 자신은 외로움에 사무쳐 살았던 독일이다. 그리고 독일 여인 헬레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앞에 드리웠던 함본을 떠올리며 오늘도 정일교先生의 얼굴은 모두가 지난 걸음처럼 그렇게. 불그락푸르락하였다. 나도 함께 코가 시큰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날이 언제였을까. 그는 점빵 신문에서 서독 광부모집을 보았다. 아내도 기꺼워하였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신촌가는 버스를 탔다. 신촌에서 동교동으로 가는 고개다. 기찻길 옆에 해외개발공사가 있었다. 광부들이 줄지어 섰다. 3일 후에 실기시험이다. 하숙집에 며칠을 기거하며 시험을 준비하였다. 방에 틀어박혀 실기시험을 구상하고 예상문제를 뽑았다. 시험 날이다. 개발공사 시험장에는 40KG들이 모래가 든 쌀가마니가 있었다. 쌀가마니를 짊어지고 30M를 빠르게 다녀오면 된다. 남들은 그대로 짊어지려고 용을 썼지만 정先生은 기지를 발휘하였다. 가운데를 움푹하게 만들어 어깨에 들어 메쳐 메니 어려울 것이 없었다. 합격. 3일 후 있은 필기시험. “여러분, 대한민국 청년이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대한민국 청년이면, 태극기를 잘 그리겠습니다. 태극기를 그리십시오!” “웅성웅성” “조용! 조용!” 이게 웬일일까. 정先生이 마침 가지고 있는 수첩에는 작은 태극기가 그려져 있었다. 따라서 그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필기 합격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일주일 뒤 신체검사다. 집에 내려가서 돈을 가지고 다시 상경하였다. 엑스레이도 찍고 채혈검사도 마쳤다. 그런데 마지막 몸무게가 문제다. 57kg 이상이어야 하는데 미달이다. 오전 11시. 간호사 한 분이 다가오더니 “점심 먹고 와서 다시 몸무게를 달죠.” 마음속으로 고맙기가 그지없다. 뭘 먹어야지 무게가 많이 나갈까. 곰탕을 먹었다. 곰탕 국물이 스테인리스 그릇에 고기 몇 조각과 함께 담겨있었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물을 또 한바가지 먹었다. 그래도 의심스러워 상점에 가서 300g짜리 삼양설탕을 샀다. 그릇에 물을 붓고 한 봉지를 남김없이 모두 탔다. 휘저어서 억지로 다 먹었다. 얼굴이 구겨지고 배가 요동쳤다. 오후 1시 20분. 몸무게를 달러 가는데 몸을 휘적휘적 저으며 갔다. 합격! 다 토하고 3일을 앓아누웠다. 최종합격. 그곳에서 3개월 동안 독일어를 배웠다. 열성으로 공부했다.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 독일로 가서 나의 삶의 질을 바꾸고 말테다. 그는 다짐하였다.

1975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그는 아내와 함께 생활필수품을 판매하였다.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 강원상회를 책임졌고 83년도 사우디로 가서 건설기술자로 일하였다. 87년도에 다시 한국으로 왔을 때 부산에서 사기도 당하였다. 1989년. 그는 아내와 함께 구인사救仁寺로 향하였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사람은 늘 변해야 한다. 밤새도록 울었다. 새벽에 예불. 반야심경을 하는데 손이 가슴을 마구 친다. 억제가 안 된다. 잠이 오지 않았다.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도를 드렸다. 4박 5일 동안 오로지 기도만 드렸다. 가슴이 뻥 뚫렸다. 마지막 날 저녁에 관세음보살. 차분한 마음이 들었다. 코끝에 꽃향기가 지나간다. 참 기도는 무아無我다. 기도를 통해서 지혜가 터득된다. 그런 경지가 있다. 그 인내가 바로 지혜다. 그것이 찰나구나.

이토록 인생의 역겁歷劫을 지낸 그가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며 지내고 있을까.

그는 현재 해외에서 침과 뜸을 놓아 치료 봉사를 하는 침구사鍼灸師다.

미얀마 딸린 따바와 센터에서 에이즈부터 중풍 환자에 이르기까지. 환자의 환부患部를 내 마음의 아픈 곳이라 말하는 정일교先生.

다음번에는 정일교先生님이 미얀마에서 어떤 삶을 살고 계시는지 한 자 한 자 옮겨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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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배우 황재희가 패이스북에 올리신 글 중에서 두번째 편
정일교 해외 침구사님(미얀마)을 만나고서[2]

 

미얀마는 인구의 대부분이 불교인 나라로 불교의 성지라고도 불리운다. 독특한 건축물을 비롯하여 미얀마 전역에서는 불교 유적지, 화려한 불탑들이 많다. 미얀마는 군부 독재 기간 동안 교육 시스템의 부재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부족했다. 2017년 6월 23일에는 현대건설 딸린 따바와 학교 건립 완공식이 개최되기도 하였다. 정일교先生님께서 보여주시는 사진 속 마을 전경과 사람들, 그리고 환자들의 모습을 본다.

“2007년도만 하여도 자동차를 보기가 어려웠죠. 그러나 지금은 자동차도 많아졌고, 시장이 형성된 마을도 생겨났고. 우리나라 기업에서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도 지었죠.” 그는 교육시설, 화장실, 도서실 등 매우 낙후된 시설이 점차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으로 바뀌어가고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따바와는 미얀마어로 ‘자연’을 뜻한다. 정일교先生님이 침구사로 치료봉사를 하고 있는 이곳 따바와 명상센터는 스님들이 지도해온 곳으로 매우 낙후된 시설처럼 보이지만 이래봬도 많게는 800명이 넘는 환자들이 모였다. 자녀들이 늙고 병든 부모를 이곳에 맡기고는 찾으러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진을 보며) 아, 이곳은 에이즈 환자 수용소입니다. 어느 날 미국의 내과 의사가 방문하였죠. 도대체 바늘을 찔러서 사람을 낫게 한다니.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더군요. 나는 한국의 무려 1500년 된 의료기술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기이하고도 신통한 침 치료가 놀라웠겠죠. 에이즈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중풍이나 척추마비, 파킨슨병 외에도 난치병인 에이즈 환자들의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일반 환자들의 반발이 심해서 그들을 따로 수용하도록 하였어요.” 젊은 아가씨가 활짝 웃으며 갓난아기를 안고 있다. “에이즈 수용소에서 아기가 태어나기도 합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죽음과 생명이 함께 공존합니다. 한계를 안다면 두려울 게 없지만 모르면 두렵죠. 내가 에이즈 환자를 안아주면 오히려 주위에서 놀라고 손사레를 칩니다만. 침만 가지고 치료한다는 건 큰 오산입니다. 환부를 치료하는 것 외에도 나는 숙성시킨 EM(유효미생물, 그는 이에 관하여 제주도에서 제대로 공부한 바 있다)을 복용토록 했습니다. 병증에 따라 긴 시간 동안 살뜰히 치료하고 보살피기도 합니다. 환자들의 삶의 방식과 생활 습관이 어떠한지도 잘 살펴야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환자들의 낫고자 하는 의지이며 노력입니다.”

눈이 크고 동그란 앳된 얼굴이다. 인도계 미얀마인 마쌀은 척추가 마비되어 어머니와 함께 이곳 센터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걷기는커녕 움직이기조차 어려웠다. 침 치료를 통해 척추가 마비되거나 풍으로 쓰러진 환자들을 일으켜 세운다. 환자들은 병증이 심하면 가족들도 의료진도 외면하기 일쑤다. 병의 근본원인을 잘 살펴서 이를 해결하고 정성을 다하여 치료를 한다면 기적은 이뤄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거꾸로 말하면 그것은 결코 기적이 아니다. 그가 신은 아니다. 기적은 결국 우리 마음 안에 생각 안에 기도 속에 있다는 것을 정일교先生님은 삶을 통하여, 생활 속 실천을 통하여 보여준다.

안타까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동네에서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는데 물이 더럽다. 내버려두면 그만인 것을 기어코 물을 맑게 만든다. 더러운 물에 아이들이 노출되기 때문에 피부염이 생기고 그렇게 병을 키운다는 것이다. 2014년도에는 잘 썩지 않는 나무를 가지고 마을 강가에 다리를 만들었다. 한국에 있을 때 서울 시내 웬만한 건설과 도로의 기초공사를 한 이력이 있는 그는 한마디로 전문가다. 참. 파독 광부로 지낼 때 일을 하는 시간 외에도 용접 기술을 배웠다. 하루를 쪼개어서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르고 자격증을 땄다. 천성이 부지런한 까닭일까. 배움을 좋아하는 까닭일까. 그의 생각도 그의 몸도 쉴 수가 없다. “다리를 만들어봤자 우기 때 떠내려갈 텐데 왜 만드느냐고 마을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하지만 6년이 지난 지금도 다리는 건재합니다. 나는 경험이 많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죠.” 그가 사람들을 모아 함께 만든 교량橋梁은 한눈에 딱 보아도 전문가의 솜씨다.

뿐만이 아니다. 마을 물탱크도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이 물을 사용하려면 50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나가 물을 길어온다. 그는 500m가 족히 넘는 파이프를 공수해 연결하여 마을식수장을 만들었다. 마을사람들이 손쉽게 물을 퍼고 샤워를 할 수 있게끔 하였다. 또한 200m 떨어진 곳에 있는 초등학교에서도 식수로 쓸 수 있게끔 하였다. 토목기술이나 농사법 자가치료법 등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가르친다. 스스로 할 수 있게끔 한다. 농촌의 살림을 일으키고, 꺼져가는 불씨를 살려내어 마을공동체를 일군다.
그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이웃을 살리고 더불어 그를 살린다. “종교는 결코 사람들이 얽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나라의 경제도 인권마저도 종교에 발목이 붙잡히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분명 신앙에 대하여 깨달은 바를 실천하는 가운데, 모든 해답은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미얀마 국영방송국에서 정일교先生님을 취재하러 왔다. 방송이 나갔는지 미얀마 현지 의료인들 몇 명이 정일교先生님을 찾아왔다.

“어머어머어머, 그래서요? 의료 행위 못하게 하려구요?”
“아니요, ‘같이’ 하자구요. 좋은 의료술이니 함께 해서 더 많은 환자들을 살리자구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한국은 어떠한가. 같은 나라인데도 양의학과 한의학이 편을 가르고 침을 튀기며 서로를 경계한다. 환자의 알 권리와 인권의 보장보다도 때로는 이권다툼이 우선이다. 나는 그것이 병증이라 생각한다. 곪을대로 곪은 썩어빠진 염증이 인간의 왜곡된 욕망이 아니고 무엇일까. 하물며 ‘민간 침구인’이라 함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무면허의료인으로 딱지붙이고 범법자 취급을 하기 급급하다.’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몸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자연의 이치를 알며 스스로를 보살피고 이웃과 가족을 쓰다듬을 줄 알았다. 바야흐로 할머니 손은 약손이던 시절이 있었다. 실제로 한국인 침구사들의 손맛은 여느 중국인과 일본인의 그것과 다르다. ‘스페인, 일본, 중국, 미얀마 등 해외에서 많은 실력 있는 한인 침구인들이 타고난 솜씨를 인정받고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빛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 침뜸의 물줄기를 정작 본고장인 한국에서 그 맥을 끊고 있는 셈이다(작은 괄호 안의 말은, 민간 침구인 협회인 허임기념사업회 손중양대표님의 말씀을 빌려온 것입니다).’

화석에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듯 생생하다. 모르는 것을 안다는 것과 할 수 없는 일을 혹은 남들이 하기 싫은 일을 해내고 마는 것은 이와 같을까.
김동진 시인이 말하였다. “나무가 남동쪽으로 누운 채 자라는 이유를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의 눈보라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정일교先生님이 태어난 그곳과 그가 만난 숱한 사람들, 그의 성질과 마음씨, 그가 겪은 우리나라 일련의 역사들, 비바람과 나무 태양 그리고 심지어 모든 장애물들까지도 지금 내 앞에 환하게 웃고 있는 그를 만들어낸 것이리라. 우리도 그렇게 만들어지리라.

그대 지금 어디 서있는가? 당신의 노년은 어떠한 것일까. 당신의 황혼은, 뒤안길은 과연 무슨 색깔일까.
진리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성찰과 탐구를 통해 찾을 수 있다. 구원의 참된 의미는 어쩌면 인간 존중, 인간 평등의 한 모습이 아닐지, 자기 자신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바로 그것이 구원이 아닐까. 그것이 곧 공동체의 이상향이 아닐까. 정일교先生님을 만나고서 문득 그런 생각들이 스쳤다.

비가 많이 내리는 10월 어느 날, 선생님과 나는 수연산방(壽硯山房)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전통 찻집이며, 원래는 상허 이태준의 고택이었다). 그는 대추차를 나는 쌍화차를 마셨다. 따뜻한 차 한 잔과 오랜 이야기가 귓가에 빗소리처럼 어른거린다. 그리고 얼마 전 미얀마에 잘 도착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언젠가 그를 그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속으로 미소지었다.

선생님, 만남 감사했습니다. 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또한 선생님께서는 ‘관세음보살’ 기도와 삶의 실천 속에서 만나뵈옵겠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2019년 10월, 배우 황재희가 썼습니다_
정일교 해외 침구사님(미얀마)을 만나고서 2. 이야기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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