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침뜸과 전문침뜸
Service to Every Being is the spirit of Wellbeing! 생명에 대한 봉사가 웰빙의 참된 정신입니다!

Home > 경락경혈&침뜸 > 생활침뜸과 전문침뜸
 ◎ 원시로부터 온 탁월한 생활의술
 
 원래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고자 한다. 자연환경에 적응해 나가고 상처가 나거나 병이 들면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침뜸의학은 이러한 생명체의 자기 존립을 위한 생물학적인 특성을 바탕으로 하여 생겨난 가장 원시적인 자연의술이다. 가려울 때 긁어서 시원하게 하는 것, 아픈 곳을 누르고 도구를 이용하여 자극하는 행위에서 시작된 것이다. 돌침․뼈침 등을 만들어 스스로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뜸은 불을 쬐면서 생겨난 원시 자연의술이다. 수천 만 년 전 원시시대부터 아픈 곳을 따뜻하게 하고, 불로 약한 화상을 입힘으로써 질병을 치료하며 발전시켜온 것이다. 헛배가 부르는 창만병에 도토리 크기의 쑥뜸을 뜨겁게 하였다. 그래도 부작용 없이 병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유용하게 쓰였다. 더구나 요즈음 쑥뜸은 쌀알 반만한 크기로 하여 각종 만성병에 훌륭한 치료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식생활과 자연치유법을 배워 익히고 생활에 활용해 왔다. 이렇듯 침과 뜸은 동양의 대표적인 자연치유법이다.
민간의술의 일반적인 특징은 배운 만큼 써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체했을 때 손가락을 바늘로 따서 사혈을 하는 민간의술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침시술이라 할 수 있다. 삼음교라는 혈자리에다 가느다란 피내침을 살짝 꽂아 두기만 해도 생리통에 효과를 본다. 족삼리에다 쌀알 반 만하게 작은 뜸을 해도 피로가 풀어지고 노인들은 다리에 기운이 좋아진다. 상투를 하거나 쪽을 찌고 다니던 시절에 남자들은󰡐동곳󰡑, 여성들은󰡐귀잠󰡑(귀이지개)이라는 뾰족한 물건을 장식물을 겸해서 하고 다니다가, 응급상황에는 이를 바로 침으로 이용했다.
침뜸은 이렇듯 원시의학으로써 문자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어온 전통적인 민간의술이다. 요즈음 같이 지적수준이 높아진 상황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침뜸 이야말로 누구든지 배울 수 있고 또 배운 만큼은 사용할 수 있는 민간의술인 것이다.
이러한 민간요법을 일반인이 활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침뜸에 대해 대단히 무지하거나, 특정이익집단의 이권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 전문업종으로 발전한 침구

 원시 침술의 발상지는 조선을 비롯한 동방지역이다. 원시 뜸술은 불을 가까이 하던 북방에서 개발됐다. 침뜸술이 중국 본토보다는 동방과 북방지역에서 나와서 문자로 기록되면서 중국 본토의학으로 발전되었다.
중국의 침구에 대한 서적이 한반도와 일본에 전해진 것은 고구려 평원왕 원년(서기 564년)이라고 한다. 중국 강남의 오吳나라 사람 지총知聰이 침구명당도鍼灸明堂圖 등을 가지고 한반도로 들어 왔다가 일본으로 갔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하며 동북아지역의 전통의술로 자리를 잡은 침과 뜸은 현대의학이 밀려들기 전까지 질병을 치료하는 핵심적인 의술로 백성들의 생활 깊숙이 자리를 잡아갔다. 즉 침과 뜸이 동북아지역에서는 ‘대체의학’이 아니라 ‘정통의학’인 것이다.
침뜸은 고려시대부터 점차 전문업종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다가 조선시대에는 침구의鍼灸醫 제도가 마련되었다.
1433년6월1일 세종 15년 의약(醫藥)에 밝아 항상 전의감 제조로 있었던 황자후(黃子厚)는“…또 병을 속히 고치는 데는 침과 뜸만한 것이 없습니다. 의원으로서 침놓고 뜸뜨는 구멍을 밝게 알면, 한 푼의 약도 쓰지 않고 모든 병을 고칠 것이니, … 각각 전문(專門)을 세우고 주중소(鑄鍾所)로 하여금 구리로 사람을 만들게 하여, 점혈법에 의하여 재주를 시험하면, 의원을 취재(取才)하는 법이 또한 확실할 것입니다.…”라고 제안, 침구전문생을 양성해 내의원과 전의감과 혜민국에 배치하도록 했다.
세종실록에는 “중추원 부사 황자후黃子厚가 건의하여 침구針灸를 전문으로 하는 업종을 창설하였고, 가을에 중추원사로 승진하였다. 자후는 의약에 밝아 항상 전의감典醫監 제조提調로 있었다.”란 구절이 있다. 실록에는 조선시대 침구를 전문으로 하는 업종의 창설과정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세종은 침뜸전문생을 매년 3명씩 선발하여 전의감, 혜민국, 제생원의 삼의사에 한 명씩 배속시켰다. 침구전문의생이 관직을 받을 수 없는 경우는 사역원별재생司譯院別齋生의 예에 의하여 도목정都目政에 교대하여 임하게 했다.
세종 24년에는, 제생원濟生院을 혁파하여 침구전문생鍼灸專門生들을 혜민 제생원惠民濟生院에 분속分屬시키고, 매년 채용할 때에는 삼의사인三醫司人이 아울러 『침구경針灸經』을 시험하게 했다.
침구전문의제도가 완성된 것은 성종 대에 이르러서다. 성종 3년(1472), 성종은 의학권장醫學權裝 10조를 정하는 중에 침구전문의를 따로 설치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성종 16년(1485), 약 1세기에 걸쳐 완성한 조선 최고의 법전『경국대전』의 의과취재(의과고시 또는 의과시험에 관한 것)에 침구분야와 약제분야의 취재를 분리한다고 기록하면서 침구를 분리ㆍ독립할 것을 법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전통의료가 전문과로 발전하여 약의藥醫와 침구의鍼灸醫로 전문화 되어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의료제도는 조선 말 근대의료기관이 처음 시작 될 때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구한말의 의료기관인 내부병원內部病院은 1899년(光武 3년)에 내부직할병원으로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일반 환자를 진료하는 외에 감옥 죄수들의 구료, 전염병 환자에 대한 피병원避病院 설치 등을 실행하였다. 이 내부병원의 직제는 주임급으로 병원장 1인과 기수技手 1인을 주고, 판임判任급 의사 15인 이하를 두기로 했다. 이들 의사 가운데 대방의大方醫 두 명과 종두의種痘醫 열명, 외과의外科醫 한명, 소아의小兒醫 한명 그리고 침의鍼醫 한명을 별도로 두고 있었다.
1900년(光武 4년)에 내부병원內部病院을 광제원廣濟院으로 개정한 뒤에도 본원의 직제에 의사 7인 가운데 대방의와 별도로 침의鍼醫 1인을 두고 있다.
이같이 침뜸의를 구분한 제도는 일제시대에도 마찬가지로 되어, 침구의鍼灸醫는 침구사鍼灸士로 약의는 의생醫生으로 하여 제도를 운영했다. 해방 후 국민의료법에는 침구를 ‘의료유사업’으로 하여 침사와 구사를 양성하는 것으로 법률을 제정했었다.

◎ 허준은 침을 몰라 … ‘침의’는 허임

 허준이 약과 침뜸을 동시에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완전히 다르다. 허준은 약의藥醫였고, 침의鍼醫는 허임이라는 걸출한 어의御醫가 또 있었다. 조선실록의 기록을 보자.
선조 37년. 밤에 선조에게 갑작스런 편두통이 발작한다. 입시한 의관 허준에게 선조가 묻는다.
“침을 맞는 것이 어떻겠는가?”
허준이 아뢴다.
“여러 차례 침을 맞는 것이 송구스럽기는 하지만, 증세가 긴급하니 상례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침의들은 항상 ‘반드시 침으로 열기熱氣를 해소시켜야 통증이 감소된다’고 말합니다. 소신은 침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허임도 평소에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아픈 바로 그 자리)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잠시 후 병풍이 쳐지고, 남영南嶸이 혈자리를 정하고 허임이 침을 놓는다. …한달 뒤, 대대적인 포상이 따른다. 어의 허준에게는 숙마 1필이 하사되고 허임과 남영은 6, 7품의 관원에서 당상관으로 파격 승진을 하게 된다.
여기서도 허준은 분명하게 ‘소신은 침을 모릅니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침의와 약의는 구분이 되어 있었다. 이처럼 조선시대 침뜸전문과 약 전문이 구분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나라 한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 때문에 침을 모른다는 허준이 침놓는 사람으로 되고, 전문침의는 없었던 것처럼 하여 역사까지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 중국 ․ 일본도 전문침뜸 역사 천년이 넘어

 동북아지역 전통의약은 침구와 한약처방이 분리되어 전문과로 발전하여 왔다. 중국에서는 진秦나라 시대부터 구비되어 오던 의관제도醫官制度가 수당시대부터 완비되면서 침구는 전문과專門科로 정비되었다. 「침사鍼師」와 「구사灸師」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의과의 대방맥과 소방맥과 등의 ‘방方’자는 중국어로 ‘약제처방’을 뜻하는 것으로 쓰이고, 침구처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본도 마찬가지로 국가기구를 정비하면서부터 침뜸이 의료분야의 가장 중요한 축을 이루는 전문분야였다. 일본의 의료제도는 701년 대보률령에 의사, 침사, 안마사, 여의女醫 등 이미 전문의 제도를 도입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에서 침뜸전문의료인이 침구사라는 명칭으로 정착되기 시작한 때는 근대적인 법제가 정비되기 시작하던 19세기 후반.
그런데 1945년 종전과 함께 시작된 맥아더 군정은 침구시술을 야만적이라는 이유로 금지시켰다. 이것은 전쟁시기에 미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일본군인들이 의약품이 부족한 가운데 침구시술로 질병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고 이를 고문의 일종으로 간주하여 침구시술을 한 군인들을 전범으로 처단한 전례에 따른 것이었다. 침구사들은 미군정의 침구시술금지조치에 항의하면서 전국적인 반대캠페인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운동에 대하여 몇몇 현대의학을 공부한 학자들이 침구의 과학적 효과를 입증하여 주었다. 그 결과 맥아더 정부는 침구금지 조치를 철회했다.

 
 당唐대에 침구과. 의과, 안마과, 주금과로 4개과 이던 것이 송宋대에는 9개과였다가 원元대의 분과는 13개과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침뜸에 대한 현대의학적인 검증 노력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의사들이 침구학을 배우는 것은 필수적이고 면허시험과목에 동양의학개론, 경락경혈학, 침구학 등의 과목이 필수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동시에 침구사들도 교육과정에서부터 현대의학에 대해 충분한 학습을 하도록 하여 침뜸을 현대적 의료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고대 이후 침구술이 꽃피었던 한국, 중국, 일본에서 한결같이 침뜸을 약제처방과 분리하여 발전시켜온 것은 침구술 고유의 특성 때문이다. 침 몇 자루와 뜸쑥, 그리고 시술자만 있으면 환자를 돌볼 수 있는 침구술은 비용이 매우 저렴한 반면 효과는 대단히 탁월하다. 환자와 국민보건, 국가 재정에 있어서는 대단히 유익하고 더없이 경제적인 치료법이다. 반면 의술로 돈벌이를 하려는 사람에게는 침구술이 󰡐힘이 들고 벌이는 얼마 안 되는 노동󰡑으로 천덕꾸러기가 되기 십상이다.

더구나 오늘날 이윤추구를 우선시 하는 시장경제에서 하나의 독립된 전문의학인 침뜸의학을 한약처방에다 섞어버리면 노력에 비해 부가가치가 덜 생기는 침구의학은 치료수단에서 밀려나거나 한약판매의 보조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침뜸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서민생활의술로서의 전통을 살려나가는 한편, 하나의 독립된 전문의료로 발전시켜나가면서 현대의술을 비롯한 다른 의술과 결합시키는 정책이 필수적이다.